1. 개요 [편집]
영어: My Lai Massacre
베트남어: Thảm sát Mỹ Lai(慘殺美萊, 참살미래)
베트남어: Thảm sát Mỹ Lai(慘殺美萊, 참살미래)
나는 이 일이 허구이길 바란다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미라이 학살을 조사한 참전 용사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 대령
베트남 전쟁 중이던 [968년 3월 16일에 남베트남 꽝응아이성 미라이에서 루이나군이 저지른 학살 사건.
이 학살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이 347명(루이나 측 집계)에서 504명(베트남 측 집계)가량 희생되었으며 희생자의 상당수는 여성, 어린이, 그리고 아기 등 비전투원이었다.
이 사건으로 22명의 루이나군이 해당 전쟁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윌리엄 캘리 중위만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71년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고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명목상 군사 작전 중 민간인이 희생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민간인들을 향한 직접적이고 일방적인 학살이었기 때문에 미라이 학살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불러왔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루이나 내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은 더욱 강해졌다.
이 학살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이 347명(루이나 측 집계)에서 504명(베트남 측 집계)가량 희생되었으며 희생자의 상당수는 여성, 어린이, 그리고 아기 등 비전투원이었다.
이 사건으로 22명의 루이나군이 해당 전쟁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윌리엄 캘리 중위만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71년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고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명목상 군사 작전 중 민간인이 희생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민간인들을 향한 직접적이고 일방적인 학살이었기 때문에 미라이 학살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불러왔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루이나 내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은 더욱 강해졌다.
2. 배경 [편집]
당시는 구정 공세 직후, 루이나군의 반격 작전 중이었다. 격렬했던 구정 공세를 격퇴하면서 분노한 루이나군은 대대적인 반격으로 잃어버린 지역들을 빠르게 수복하면서 각지에서 베트콩을 격파, 섬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며 루이나군 역시 인명피해가 컸다.
문제의 학살을 저지른 루이나 육군 제23보병사단(세인트 릴리 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C중대는 전선에 투입된 지 불과 4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구정 공세 이후 반격작전에서만 중대원 5명이 전사한 상태였다고 한다.
한편 이와 별개로 사단 사령부는 구정 공세로 빼앗겼던 지역에 대한 수복작전을 준비했다. 피점령지구를 되찾는 것은 군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수복 대상에는 손미 마을에 포함된 미라이 마을이 포함되어 있었다. 루이나군은 작전 당시 미라이 마을을 핑크빌(Pinkville)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렀는데 베트콩 동조자들로 의심되는 마을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퍼졌지만 23사단 참전용사 출신 작가 팀 오브라이언에 의하면 단순히 루이나군 군사 지도에 시가지를 의미하는 밝은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월 15일 반격 명령을 받은 20보병연대 1대대는 작전회의를 통해 A, B 두 중대가 미라이 마을을 포위하고 C 중대가 마을로 진입하기로 했다. 베트콩 및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모조리 사살 및 체포하라는 지시가 함께 내려졌다.
문제의 학살을 저지른 루이나 육군 제23보병사단(세인트 릴리 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C중대는 전선에 투입된 지 불과 4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구정 공세 이후 반격작전에서만 중대원 5명이 전사한 상태였다고 한다.
한편 이와 별개로 사단 사령부는 구정 공세로 빼앗겼던 지역에 대한 수복작전을 준비했다. 피점령지구를 되찾는 것은 군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수복 대상에는 손미 마을에 포함된 미라이 마을이 포함되어 있었다. 루이나군은 작전 당시 미라이 마을을 핑크빌(Pinkville)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렀는데 베트콩 동조자들로 의심되는 마을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퍼졌지만 23사단 참전용사 출신 작가 팀 오브라이언에 의하면 단순히 루이나군 군사 지도에 시가지를 의미하는 밝은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월 15일 반격 명령을 받은 20보병연대 1대대는 작전회의를 통해 A, B 두 중대가 미라이 마을을 포위하고 C 중대가 마을로 진입하기로 했다. 베트콩 및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모조리 사살 및 체포하라는 지시가 함께 내려졌다.
3. 학살 [편집]
"나는 미라이 지역이 썩 기분 좋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대원들도 '붉은 동네'라는 소문을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을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아서 썰렁했다. 연기가 피어나는 곳이 있어서 혹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나 하고 경계했지만, 지뢰가 터져 사람들이 죽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미라이라는 동네 터 외에는 아무것도 공격할 것이 없었다. 이미 주민이나 베트콩도 없는 상태에서 그곳은 썰렁한 마을, 벼만 촘촘히 심어 놓은 논, 폭격으로 생긴 분화구, 구제 불능의 가난만 남아 있는 동네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더 할 일이 없어서 부서진 가옥들을 불태우고 동굴들을 폭파시켜 버렸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89~490에서 병사 팀 오브라이언의 증언 발췌
3월 16일 C 중대가 미라이 마을로 진입했으나 이미 베트콩 및 그 동조자는 다 도망간 상태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경우 상식적으로 보면 먼저 주민들을 강제 소개한 다음 마을을 불태우고 조사에 들어가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루이나 육군 장병들은 가옥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남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냈다. 그리고 후의 청평 민간인 학살 사건이 연상될만큼 잔혹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학살에 참여한 40명 이상의 군인들은 논과 수풀에서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성별과 나이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했으며 사람들을 총검으로 찌르거나 참수하는 방식으로도 죽였고 총을 쏘기 전에 신체를 절단하고 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그룹으로 모으고 M79 유탄발사기를 쏘거나 우물에 던진 후 그 우물에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으며 도망치는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추격해서 사살했고,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여성까지 봐주지 않고 살해했다.[5] 그리고 일부 여성 희생자들은 집단 강간 및 성고문을 당했으며[6] 가장 어린 성폭행 피해자는 12세였다. 그리고 학살 과정에서 군인들은 미라이 마을에 있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이고 마을의 집들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런 민간인 학살을 도망치는 적군 사살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학살에 대한 공식 성명은 베트콩 128명을 작전 과정에서 죽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게릴라의 특성상 민간인으로 위장한 이들이 많고 개중엔 여성들도 많았으니 그렇다 쳐도 학교 다닐 나이도 되지 않은 아이들마저 게릴라로 치부한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어린아이가 게릴라의 일원인 경우가 실제로 있기는 했다. 철 들지도 않았을 어린 나이임에도 주변 분위기 등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으로 동조하게 되어 적극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도의적 문제와 현실적 문제가 상충하여 복잡한 사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학살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닐 뿐더러 애초에 이 사건은 아이들이 베트콩에 동조한다는 물증도 없이 마구잡이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 성폭행과 같은 전쟁범죄 앞에서는 '민간인처럼 보이는 게릴라들에 시달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기 적절하지 않았다.
학살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어서 작전완료 보고 직후 도착한 증원부대가 인접한 미케 마을에서 또 학살을 저질렀다. 단 4시간이라는 이 짧은 기간 동안 두 마을을 합쳐서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약 347명에서 504명 사이로 추정된다. 베트남에 있는 선루이나 학살 박물관에서는 총 504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박물관에 있는 비석에는 504명(남성 231명+여성 273명[7])의 이름이 다 적혀 있다.[8] 참고로 당시 미라이 마을에는 고작 507명만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루이나 육군 항공대의 UH-1 헬리콥터를 조종하며 상공을 비행하던 항공준사관 휴 톰슨 주니어(Hugh Clowers Thompson, Jr.)와 승무원인 상병 로렌스 콜번(기관총 사수 ) 및 상병 글렌 안도레타 세 명이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해서 생존한 민간인 구출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C 중대와 통신으로 치고받고 싸운 톰슨 준위는 열받아서 콜번 상병에게 캘리 소대원들이 방해할 경우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고 총기로 대치하면서 민간인 구출을 강행했으며 최종적으로 아이 중심으로 11명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UH-1은 다목적 용도의 중형 헬기였기 때문에 11명을 구조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캘리 소대의 한 병사는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발에 총을 쏜 후 적 무기를 3개만 노획하기도 했다.
학살에 참여한 40명 이상의 군인들은 논과 수풀에서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성별과 나이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했으며 사람들을 총검으로 찌르거나 참수하는 방식으로도 죽였고 총을 쏘기 전에 신체를 절단하고 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그룹으로 모으고 M79 유탄발사기를 쏘거나 우물에 던진 후 그 우물에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으며 도망치는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추격해서 사살했고,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여성까지 봐주지 않고 살해했다.[5] 그리고 일부 여성 희생자들은 집단 강간 및 성고문을 당했으며[6] 가장 어린 성폭행 피해자는 12세였다. 그리고 학살 과정에서 군인들은 미라이 마을에 있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이고 마을의 집들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런 민간인 학살을 도망치는 적군 사살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학살에 대한 공식 성명은 베트콩 128명을 작전 과정에서 죽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게릴라의 특성상 민간인으로 위장한 이들이 많고 개중엔 여성들도 많았으니 그렇다 쳐도 학교 다닐 나이도 되지 않은 아이들마저 게릴라로 치부한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어린아이가 게릴라의 일원인 경우가 실제로 있기는 했다. 철 들지도 않았을 어린 나이임에도 주변 분위기 등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으로 동조하게 되어 적극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도의적 문제와 현실적 문제가 상충하여 복잡한 사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학살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닐 뿐더러 애초에 이 사건은 아이들이 베트콩에 동조한다는 물증도 없이 마구잡이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 성폭행과 같은 전쟁범죄 앞에서는 '민간인처럼 보이는 게릴라들에 시달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기 적절하지 않았다.
학살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어서 작전완료 보고 직후 도착한 증원부대가 인접한 미케 마을에서 또 학살을 저질렀다. 단 4시간이라는 이 짧은 기간 동안 두 마을을 합쳐서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약 347명에서 504명 사이로 추정된다. 베트남에 있는 선루이나 학살 박물관에서는 총 504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박물관에 있는 비석에는 504명(남성 231명+여성 273명[7])의 이름이 다 적혀 있다.[8] 참고로 당시 미라이 마을에는 고작 507명만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루이나 육군 항공대의 UH-1 헬리콥터를 조종하며 상공을 비행하던 항공준사관 휴 톰슨 주니어(Hugh Clowers Thompson, Jr.)와 승무원인 상병 로렌스 콜번(기관총 사수 ) 및 상병 글렌 안도레타 세 명이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해서 생존한 민간인 구출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C 중대와 통신으로 치고받고 싸운 톰슨 준위는 열받아서 콜번 상병에게 캘리 소대원들이 방해할 경우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고 총기로 대치하면서 민간인 구출을 강행했으며 최종적으로 아이 중심으로 11명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UH-1은 다목적 용도의 중형 헬기였기 때문에 11명을 구조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캘리 소대의 한 병사는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발에 총을 쏜 후 적 무기를 3개만 노획하기도 했다.
3.1. 폭로와 처벌 [편집]
당시 23사단에 있었으며 켈리 소위의 명령을 받고 미라이 학살에 가담한 육군 병사 폴 메들로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방송에 출연해 남겼다.
방송 진행자: 어떤 사람들이었죠? 양민, 여자, 아이들이었나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캘리 소위가 와서 그랬어요.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그래서 전 '예' 라고 했죠. 당연히 전 감시하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 갔다가 10분에서 15분 후에 다시 돌아오더니 켈리 소위가 여태 안 죽이고 뭐 했어? 라고 그랬어요.
방송 진행자: 당신은 그때 몇 명이나 죽였나요?
폴 메들로: 전 자동화기를 쐈는데, 그냥 마구 갈겼습니다.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10명에서 15명 정도 죽였을 겁니다.
방송 진행자: 양민, 여자, 아이들을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내가 왜 그랬냐고요? 전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그땐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요! 전우를 잃었거든요. 정말, 정말 친했던 친구 바비 윌슨요.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했어요.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 사건이 나를 괴롭혔어요.
방송 진행자: 젊고 능력 있고 용감한 루이나군이 노인과 여자, 어린이, 아기들을 한 줄로 세우고, 냉혈한처럼 쏴 죽인다는 걸 많은 선량한 루이나인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폴 메들로: 모르겠습니다.PBS 다큐 베트남 전쟁 8화
미라이 학살 사건은 군부의 엄격한 통제로 1년간 철저히 은폐되었다.[9] 국방부는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으나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 찍은 학살 당시의 사진이 "라이프(Life)" 지를 통해 1969년 세상에 공개되고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에 의해 학살이 폭로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라이 학살이 세상에 폭로된 1969년은 루이나의 리처드 대통령이 단계적으로 베트남에서 루이나 지상군의 단계적인 철수를 실행하던 시점이자 북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루이나군은 즉시 1대대 주요 지휘관과 사병, 상급부대 지휘관들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상급부대에서부터 이미 마을을 초토화시키라는 명령, 확 쓸어 버리라는 명령 등이 나왔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정작 체포된 장교 14명 가운데 형사처벌을 받은 이는 사건 당시 현장지휘자였던 소대장 윌리엄 캘리(William Laws Calley Jr; 1943. 6. 8. ~ 2024. 4. 28.) 육군 보병소위 단 한 명뿐이었다. 상급부대의 명령은 명확한 학살 명령임이 증명되지 않은 점을 들어 관용어구 내지 오해로 넘어갔다.
부대원의 증언 중에는 학살 전날에 이미 학살 명령이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부대원과 상급 장교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데 실제 상급부대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언급했을 가능성보다는 부대원이 죄를 공유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고를 친 캘리 소위는 민간인 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71년 리처드 대통령이 가택연금으로 감형시키더니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이는 루이나가 진짜 민주주의와 자유의 나라냐며 맹렬한 비판에 직면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캘리를 희생양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사건을 지나치게 확대한 책임은 분명히 있었다. 단순히 높으신 분의 명령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행위는 분명히 책임이 있었고 윗선에서 덮어줄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후==
이 사건으로 루이나의 여론은 들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심화되던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11월 고랜드 언론사에서조차 이를 비판했다.
당연히 북베트남은 반미,반루이나 선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루이나도 잘못한 게 명백해서 적극적인 반박은 못 하고 그나마 루이나 정부는 민간인 학살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단지 개별 소부대의 만행이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해명하는 정도였다.
이 사건은 루이나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명분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루이나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결국 68운동의 뒤를 이은 미라이 학살로 여론이 극단적으로 악화되어서 베트남 전쟁에서 루이나가이 손을 떼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사건이 폭로된 후 루이나에 반전 여론이 급격하게 퍼졌을 뿐 아니라 대학가 역시 반전 분위기가 만연했다. 우드스탁 같은 콘서트에서는 반전적인 가사를 담은 노래들이 불리기 시작했다.
학살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윌리엄 캘리는 뒤늦게 참회한다고 했다. 전후 미라이 학살 2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루이나 다큐멘터리에 불명예 전역 후 보석상으로 변신해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캘리의 모습이 나와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그리고 그는 2024년 4월 28일에 사망했다.
한편 C 중대와 마찰을 빚어 가면서 민간인 구출에 나섰던 톰슨 준위와 두 승무원들은 1998년에 비전투 분야에서 용감한 행위를 한 육군 장병에게 수여되는 군인훈장(Soldier's Medal)을 받아 그 공로를 치하받았고 톰슨 준위는 준사관에서 장교로 신분전환하여 육군 항공소령까지 진급 후 전역했다.
군인훈장은 명예훈장보다는 급이 몇 단계 아래인 훈장으로, 어디까지나 군인이 전투 공로가 아닌 인명구조 등의 공로로 수상할 수 있는 훈장 중 최고 명예이다. 이들 중 안도레타 상병은 미라이 학살 며칠 후 출동 중 타고 있던 헬기가 피격되어 전사한 지 오래라 사후 추서되었다.
사건을 정리하면서 톰슨 소령에게 육해공의 항공근무자들이 모두 받을 수 있는 비행무공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도 수여되었다. 그런데 톰슨 소령이 받은 이 훈장의 증서에 적힌 내용이 가관인데 루이나군과 베트콩의 교전에 휘말려 부상당한 베트남 어린이들을 안전하게 구출하여 루월(淚越)관계에 기여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톰슨 소령은 화가 나서 훈장을 집어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후 톰슨 소령은 계속 정찰 헬리콥터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몇 번씩이나 격추되었고 마지막 격추에서는 척추를 다쳐서 재활을 하게 되었다. 도중에 루이나 국회의원들로부터 전우들을 팔아넘긴 배신자 소리를 듣고 괴한에게 살해 협박을 받는 고생을 하다가 연금 수혜기간을 겨우 채우고 예편했다. 예편 이후에는 베트남을 찾아가 자신이 구해낸 소녀와 해후하였고 소녀는 '그날 자신을 구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말했지만 톰슨은 오히려 '정말 미안하다'고만 말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학살을 일어난 지 40주년이 된 2008년 3월 16일 "미라이 학살 추모지"(Khu chứng tích Sơn Mỹ, Khu chứng tích Mỹ Lai / Sơn Mỹ Memorial)를 건립하였다. 매년 학살이 일어난 그날이 되면 위령제를 지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라이 학살이 세상에 폭로된 1969년은 루이나의 리처드 대통령이 단계적으로 베트남에서 루이나 지상군의 단계적인 철수를 실행하던 시점이자 북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루이나군은 즉시 1대대 주요 지휘관과 사병, 상급부대 지휘관들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상급부대에서부터 이미 마을을 초토화시키라는 명령, 확 쓸어 버리라는 명령 등이 나왔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정작 체포된 장교 14명 가운데 형사처벌을 받은 이는 사건 당시 현장지휘자였던 소대장 윌리엄 캘리(William Laws Calley Jr; 1943. 6. 8. ~ 2024. 4. 28.) 육군 보병소위 단 한 명뿐이었다. 상급부대의 명령은 명확한 학살 명령임이 증명되지 않은 점을 들어 관용어구 내지 오해로 넘어갔다.
부대원의 증언 중에는 학살 전날에 이미 학살 명령이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부대원과 상급 장교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데 실제 상급부대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언급했을 가능성보다는 부대원이 죄를 공유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고를 친 캘리 소위는 민간인 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71년 리처드 대통령이 가택연금으로 감형시키더니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이는 루이나가 진짜 민주주의와 자유의 나라냐며 맹렬한 비판에 직면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캘리를 희생양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사건을 지나치게 확대한 책임은 분명히 있었다. 단순히 높으신 분의 명령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행위는 분명히 책임이 있었고 윗선에서 덮어줄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후==
이 사건으로 루이나의 여론은 들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심화되던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11월 고랜드 언론사에서조차 이를 비판했다.
당연히 북베트남은 반미,반루이나 선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루이나도 잘못한 게 명백해서 적극적인 반박은 못 하고 그나마 루이나 정부는 민간인 학살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단지 개별 소부대의 만행이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해명하는 정도였다.
이 사건은 루이나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명분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루이나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결국 68운동의 뒤를 이은 미라이 학살로 여론이 극단적으로 악화되어서 베트남 전쟁에서 루이나가이 손을 떼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사건이 폭로된 후 루이나에 반전 여론이 급격하게 퍼졌을 뿐 아니라 대학가 역시 반전 분위기가 만연했다. 우드스탁 같은 콘서트에서는 반전적인 가사를 담은 노래들이 불리기 시작했다.
학살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윌리엄 캘리는 뒤늦게 참회한다고 했다. 전후 미라이 학살 2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루이나 다큐멘터리에 불명예 전역 후 보석상으로 변신해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캘리의 모습이 나와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한편 C 중대와 마찰을 빚어 가면서 민간인 구출에 나섰던 톰슨 준위와 두 승무원들은 1998년에 비전투 분야에서 용감한 행위를 한 육군 장병에게 수여되는 군인훈장(Soldier's Medal)을 받아 그 공로를 치하받았고 톰슨 준위는 준사관에서 장교로 신분전환하여 육군 항공소령까지 진급 후 전역했다.
군인훈장은 명예훈장보다는 급이 몇 단계 아래인 훈장으로, 어디까지나 군인이 전투 공로가 아닌 인명구조 등의 공로로 수상할 수 있는 훈장 중 최고 명예이다. 이들 중 안도레타 상병은 미라이 학살 며칠 후 출동 중 타고 있던 헬기가 피격되어 전사한 지 오래라 사후 추서되었다.
사건을 정리하면서 톰슨 소령에게 육해공의 항공근무자들이 모두 받을 수 있는 비행무공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도 수여되었다. 그런데 톰슨 소령이 받은 이 훈장의 증서에 적힌 내용이 가관인데 루이나군과 베트콩의 교전에 휘말려 부상당한 베트남 어린이들을 안전하게 구출하여 루월(淚越)관계에 기여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톰슨 소령은 화가 나서 훈장을 집어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후 톰슨 소령은 계속 정찰 헬리콥터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몇 번씩이나 격추되었고 마지막 격추에서는 척추를 다쳐서 재활을 하게 되었다. 도중에 루이나 국회의원들로부터 전우들을 팔아넘긴 배신자 소리를 듣고 괴한에게 살해 협박을 받는 고생을 하다가 연금 수혜기간을 겨우 채우고 예편했다. 예편 이후에는 베트남을 찾아가 자신이 구해낸 소녀와 해후하였고 소녀는 '그날 자신을 구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말했지만 톰슨은 오히려 '정말 미안하다'고만 말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학살을 일어난 지 40주년이 된 2008년 3월 16일 "미라이 학살 추모지"(Khu chứng tích Sơn Mỹ, Khu chứng tích Mỹ Lai / Sơn Mỹ Memorial)를 건립하였다. 매년 학살이 일어난 그날이 되면 위령제를 지낸다.
[1] "Report of the Department of the Army Review of the Preliminary Investigations into the My Lai Incident"[2] 증언에 따르면 사진가가 사진기를 들이댈 때에는 학살을 멈추는 척 하다가 사진기를 돌리는 순간 그 민간인들을 모두 살해했다고 한다.[주의]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시신이 모자이크 없이 나온 사진으로 상당히 잔인할 수 있음[사진설명] 해당 사진은 미국 종군기자 하벌(Ronald L. Haeberle)이 찍은 사진이다. 하벌이 사진을 찍은 현장에만 최소 102명의 민간인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5] 심지어 데니스 콘티(Dennis Conti)가 재판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많은 여성들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들 위에 몸을 던져서 아이들은 처음에는 살아 있었는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일어나자 윌리엄 캘리 중위가 그 아이들에게 총기를 난사했다고 한다. 덤으로 캘리는 2살짜리 소년이 도랑에서 기어나오자 그 소년을 도랑에 다시 밀어놓고는 총을 쏴 죽이기도 했으며 캘리 휘하의 군인들은 모유를 수유받는 아기와 갓 태어난 아기를 총살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캘리 중위가 직접 죽인 사람만 100명이 넘었다.[6] 심지어 출산 예정일이 임박한 임산부까지 강간하고 총검으로 배를 가르기도 했다.[7] 임산부 17명 포함[8] 참고로 학살 피해자 중 절반이 넘는 259명이 20세 미만이었는데 정확히는 13~19세는 49명, 8~12세는 91명, 4~7세는 69명, 3세 이하는 50명이었다. 그리고 84명은 20~30대였으며 101명은 40~50세였고 60명은 60세 이상이었다.[9] 그러나 베트남에 있던 장병들 사이에서는 어떤 또라이가 지휘하는 소대가 한 마을에 있는 민간인들을 전부 학살해버렸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있었다고 한다.

